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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온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포하시는데, 아무리 재판장이라도 함부로 의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함부로' 라는 말을 여러분 꼭 붙들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진노의 하나님 또한 깊이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심판의 하나님 또한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 3장 26절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어떤 대학의 총장이 있다고 합시다. 공의롭고 바른 총장이라면 함부로 아무나 입학을 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 아들이라고 마음대로 다 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주 공의로운 왕이라면 법을 세워 그 법에 따라서 치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로서 세상을 치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헬라인들은 우주를 코스모스(cosmos) 라고 했는데 ‘질서’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신 것도,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도 공의를 따라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 공의의 기준이 무너져 버린다면 어디에서 의로움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모든 것이, 우주의 모든 것이 그 기준을 잃어버리는 대혼란에 빠져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 하나님과의 단절, 그러므로 말미암아 칠흙처럼 짙어진 죄악의 세계. 이것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해서 한 번에 없다고 할 수 있으리요? 요한복음 18장에 주께서 기드론 시내를 지나 겟세마네로 들어가십니다. 유월절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내 위의 성전에서 양을 잡는데 그 피가 시내를 붉게 물들 정도였습니다. 그 피가 흐르는 시내를 건너서 그 동산으로 들어가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골고다에 달리시기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순종의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까지도 의로움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정말 절묘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되었던 사이였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야만적인 제물의 피흘림, 그 희생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제단에 뿌려졌던 수많은 피들을 보며, 그 희생을 보며 우리는 자신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라(딤전 1:15)”고 했던 사도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내가 가야만 했던 그 형벌의 길을 주께서 대신 가신 것입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고, 이것을 함부로 말한다면 정말 불경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죽음은, 이 거룩한 사랑은 사라져 버리고 왜곡된 해석이 나왔다 해봅시다. 정말 두려운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정말 두려운것입니다. 주님은 그 수많은 고통의 현장가운데서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을 면케 하는데 포도주를 거절하시고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그 형벌을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시고 다 지고 가신 것입니다. 그 위대한 사랑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단번에’ 이긴 것입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시고 예수 믿는 자도 의롭다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 그 대속의 길은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나타내신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9장을 통해 로마서 3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히브리서 9장 26절,28절을 봅시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속죄는 정말 극적인 것입니다. ‘단번에’ 죄의 모든 것을 청산한 사건입니다. 나의 죄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죄까지 말입니다. 그 죄가 어떤 것이었는가? 히브리서 9장 13절을 봅시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히 9:13) 그 희생을 통해서 불의한 내가 공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이 피로 말미암아 내가 정결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육체의 정결함이라고 했습니다. 제물로 말미암은 화해입니다. 바울은 제사 법전 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든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율법의 제사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제물의 피가 육체를 정결케 하는 것이었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무엇을 깨끗케 하는 것입니까?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주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신 우주적인 사건, 이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죄의 깊은 세계의 모든 것들을 ‘단번에’ 다 씻으셨습니다. 어떤 학생이 질문했습니다. 속죄의 사건이 또 일어날 수 있습니까? 또 다시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므로 우주적인 죄의 모든 것이 청산되었으니,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장벽이 허물어졌고 이미 화해가 되었으니 다시는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의 피, 이 구속의 능력은 한 번에 모든 것이 다 청산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제물이라는 것은 매년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흘림이라는 것은 육체를 깨끗이 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는 단번에 모든 것을 청산한 매우 극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과 희생, 사도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 주님의 순종과 제자들의 순종. 이것들은 정말 어둠의 세계에 번쩍 나타나는 번개와 같습니다. 번개가 나타나면 다 보입니다. 이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히브리서 10장 10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히브리서 10장 18-19절을 보겠습니다.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8-19).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결함을 얻었습니다. 양심의 씻김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