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본문: 사도행전 4장 1-31절
사도행전 4장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어떻게 사도들이 복음을 힘차게 전파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 앞에 서서 적대 세력을 담대하게 대응했고 그것을 돌파해냈습니다. 적대세력이라 함은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교회가 존재조차도 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적대자들의 포위망을 뚫고 그 경계를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그 두려운 자리에 나아가서 힘차게 말씀을 전했을 때, 예수 믿는 자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성전에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두번째의 자리에 해당하는 자들이 성전을 맡은 자들입니다. 성전 맡은 자라 함은 성전을 수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잡아서 관원에 넘겨주어 예수를 죽인 자들이었습니다. 여기 사도들이 정말 담대한 것은 그 성전에 그 동일한 사람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과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지금 사도들이 적대세력과 부딪히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부딪힌 것이 무엇이었냐면, 사도들이 전했던 부활 메시지였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이런 반대를 경험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어떤 부딪힘이 있을지라도 그들은 담대하게 전해야 할 말씀을 담백하게 전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메세지의 핵심이 무엇이냐면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말씀하셨던 부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는 늘 이 구절을 우리의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대표적인 두 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두개파였고 또 하나는 바리새파였습니다. 사두개파는 제사장직을 이어 받은 사람들이었고 성전의 지배세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었습니다. 반면, 바리새파들은 부활을 믿었던 자들입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의 메세지가 전해지는 것을 너무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선포하는 진리 안에 부활의 메세지가 생략된다든지, 여러분의 믿음이 부활신앙 위에 서있지 않는다든지 한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다 허망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이 없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는 베드로가 ‘부활’을 힘주어 전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부활’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의 사도들이 메세지를 전할 때,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단이 꼭 허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만 전하지 않는다면, 전도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가차 없이 여기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4: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그러므로, 사도들이 잡혔습니다.
[사도행전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예수를 믿는 자의 수가 남자의 수만 세어도 5,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전파되었는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사도행전 4: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이튿날 관원들도 이 재판의 자리에 왔습니다. 이 놀라운 예수운동이자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정하기 위해서 종교권력을 가진 자들이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을 모이게 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4: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여기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 등 악독한 대제사장의 문중들이 다 참여했습니다.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고 안나스는 사실 현직 대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 역임–안나스: A.D. 6년~15년, 가야바: A.D. 18년~36년) 그러나 안나스는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사도행전 4:7]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그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종교권력에 의해서 이렇게 끌려가서 심문(재판)을 받아 본 적 있습니까?
베드로가 쓴 첫번째 편지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사도가 권면하길, 누군가 우리에게 물어보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것을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사도는 그가 써 보낸 편지의 권면의 말씀처럼, 정말 온유한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부패하고도 불같이 협박하는 권력자들 앞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사도행전 4:8-10]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관원)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해서 백성의 관원들과 장로들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 백성이란, 허황한 종교권력에 동조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백성의 관원들까지 선동해서 여기로 데려왔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법으로는 사도들을 처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관원들과 장로들에게 지금 온유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존중의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이 병자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질문하는 것입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병자는 나면서부터 40년동안 앉은뱅이였다가 병고침을 받은 자입니다. “[행 4: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이런 기적이 분명히 일어났고 이것을 여기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 끝에 무슨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전통이 어디서부터 온 것이냐면, 여기서부터 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치유(구원)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받았다는 것을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