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본문: 누가복음 7:37-38, 마가복음 14장 3-9절
[누가복음 7:37-38]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마가복음14:3-9]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과 함께 살았던,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던 제자들은 여인의 사랑의 행위를 어떻게 보았습니까? 그들이 사랑을 보는 눈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막14:4-5) 라고 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가난한 자는 항상 함께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신15:11).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막14:7)고 하셨습니다.
여인이 드러낸 사랑은 순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매우 계산적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계산적이 되고 따지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사랑에 빠져 보십시오. 사랑에 빠진 자는 무모합니다. 앞뒤를 따지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고 허비로 여겨질 정도로 주고 또 줍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랑의 행위가 계산적이 될 때,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3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공통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를 분석하고 따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정말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섭니다. 한 마리가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 귀하단 말입니까? 한 마리를 버려두고 아흔 아홉 마리를 돌보고 지극한 정성과 관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매우 어처구니없고 이성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단호하게 하나가 아흔 아홉 보다 더 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 명 한 명의 영혼이 모두 천하 보다 귀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를 보면, 여인이 은전을 하나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 찾고 난 후에 기뻐서 잔치를 합니다. 드라크마 하나를 찾은 것보다 잔치비용이 더 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가 찾아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양에 대한 관심, 소외된 자를 향한 관심,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은 한없이 똑똑하고 계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사랑의 행위를 아름답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무가치한 허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인의 사랑의 행위는 매우 감동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 주님과 가깝게 있었던 자들이 왜 주님에게 진정한 사랑을 드러내는 자들을 보고 그것을 오해하고 분노한 것입니까? 그들은 사랑을 사랑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똑똑하고 계산적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사랑을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주께서 보시는 초점은 향유 옥합이 아니라, 주님께 무조건적으로 아낌없이 모든 것을 드린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것을 귀하고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주께서 베푸신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허비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소유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문둥이 시몬의 집을 찾아간 것, 그 문둥병자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품고 치유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랑의 허비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당신의 피까지 아낌없이 흘리셨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주께서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까지 누가 크냐며 서로 다투었던 제자들의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을 볼 때, 어찌 보면 주님의 사랑이 쓸모없는,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는 사랑처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주님은 끝까지 아낌없이, 죽기까지 제자들에게 사랑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허비라고 생각될 정도로 주님은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기도]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죄인을 용서하신 그 사랑이 커서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주님께 모두 드렸습니다. 이것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안에 제자들처럼 계산적이고 여인 안에 아름다운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이 있지는 않은지 이 시간 돌아봅니다. 사랑할 수 없는 나병환자를 품으시고 사랑하신 주님. 보혈을 피를 아낌없이 흘려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신 주님께 전부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먼저는 주께서 어떠한 사랑을 베푸셨는지 깨닫길 원합니다. 보배로우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