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야고보 사도가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너희로 온전함을 이루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다니면, 예수 믿으면 처음부터 아무 어려움 없이 모든 것이 쉬울 것이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복음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환난과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가시밭길을 헤치고 가는 신앙 길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처했던 현실, 축복을 받은 이가 직면했던 현실은 광야(wilderness)였습니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올바른 가르침입니다. 죄악의 세계에서 우리가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뤄나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까? 그 과정 가운데 많은 환난, 시험, 그리고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여기서 꼭 붙들어야 하는 것은 시험을 당하면 온전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 사도는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바울과 야고보, 이 두 사도가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에 야고보가 있었다면, 이방의 교회에는 바울이 있었습니다. 이 둘은 양극의 대립과 같은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르치는 메시지가 동일합니다. 사도들 안에 있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어떤 시련과 역경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인내케 하고 더 좋은 것을 가져다줌으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면 우리가 무엇을 배웁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오래 참으사, 어떻게 오래 참을 수 있는 거죠? 고난의 의미 안에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한시적입니다. 고난은 잠깐 있다가 지나가는 것이고, 더 좋은 소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이것은 내게 유익이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믿음(faith)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나를 연단시킵니다. 잘 참게 하고 나를 훈련한 다음에 더 큰 소망의 미래로 데리고 갑니다. 이것이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히 11:1, ESV).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은 미래에 있는 소망을 끌어다가 오늘의 실상으로 갖다 놓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아직 안 보이는 것을 오늘에 가져다가 내가 보게 하는 힘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선취(先取)라고 하는데, 더 고상하고 멋있는 말로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너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도다. 제가 좋아하는 고린도 후서 4장 17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미래에 있는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바울은 이것을 “소망”이라고도 하고 “영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더 좋은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나를 삼키는 힘이란 말입니다. 미래의 소망과 영광이 내가 어떤 상황 가운데 처했더라도 오늘의 나를 삼켜버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믿음은 이러한 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말하고 심판하는 경박한 자세는 결코 예수 믿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 안에 있는 믿음은 오늘 어떠한 환난이 온다 할지라도, 그 환난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의 하나님의 영광의 미래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환난이기 때문에, 그것은 미래에 있는 소망과 영광에 삼켜진 환난이기 때문에 나를 기쁨과 평안 가운데 거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