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SCROLL TO TOP

IMG_20250119_221957_612 (1).jpg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바울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아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받는다는 것은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모방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인간이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과 인간은 영원과 시간의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같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까? 그 힌트는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다음 구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 5:2a). 


  하나님을 본받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축도(고후 13:13)를 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먼저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론은 그리스도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


여기 시작이 “그러므로”로 시작됩니다. 앞부분(엡 4:25-32)에 이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앞부분에서 우리가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바울사도는 말씀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변화가 생겨서 많은 사람 앞에서 모범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 권면에 이어서,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자(닮은 자)가 되라고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상황]

 

초대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성령이 약동하는 교회였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는 더 그러했습니다. 비록 고린도라는 도시는 죄악의 도시였지만, 고린도교회는 정말 성령의 역사가 약동하는 교회였음을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들은 모두다 그러했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였습니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구분없이 성령이 내렸습니다. 연령이나 계급이나 성별을 다 뛰어넘어서, 모든 이에게 성령이 내렸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신분을 아주 엄격하게 정해 놓고 살았던 시대에, 신분을 철폐한 성령의 강림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해방감을 주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