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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라고 했습니다(요일 4:8).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9-10)”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살리려고 하신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때문에, 화목제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보여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묵상하는 종교입니다. 매우 특이한 종교입니다. 어떤 죽음을 묵상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죽음을 묵상합니다. 그 죽음을 대속(代贖), 속량(贖良)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속(贖)”이라는 말에는 조개패(貝)가 있습니다. 조개는 옛날의 화폐입니다. 돈을 주고 매매하는 것이 “속(贖)”입니다. 이것은 댓가를 주고 사고 파는 것입니다. 댓가를 치르므로 그 행위가 합법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그 댓가를 치르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은 매우 합법적이고 적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일서 4장에 “사랑은 여기 있으되”, 또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함으로 우리가 그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고린도전서 13장에도 보면, ‘주께서 나를 아신 것처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의미입니다. 주께서 나를 이미 사랑하신 그 사랑을 통해서, 내가 주를 알게 되었고 주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고전 13:12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것이 사랑의 장(고린도전서 13장)의 마지막 진술이자 고백입니다.

 

[요 14:20-21]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주께서 이런 깊은 세계를 얘기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주님과 하나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으로 이 계명을 잘 지킬 때, 하나 됩니다. 이 깊은 말씀의 세계를 알 때, 우리가 영으로 하나 되고, 심정적으로 하나 됩니다. 그런 아름다운 때가 올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