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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울의 회심

사울의 회심장면을 깊이 보길 바랍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로 일으켜 세워지는 전 과정을 잘 보길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회심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상태까지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여기에 같이 갔던 동행자들이 있었습니다. “[행26:13-14]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이것이 얼마나 장엄한 광경입니까? 태양보다 밝은 광명한 빛이 비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엄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땅에 이렇게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주께서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사울이 대답을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여기 사울이 “주여”라고 했습니다. 주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런 장면을 보여주시는 분은 주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뉘시오니이까?”라는 말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행하시는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께서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셨을 때, 사울은 “주여”라고 바로 대답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사울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면, 여러분은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왕으로부터 소명을 받을 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을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불려지는 장면입니다. 이사야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도행전 9:6-7]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도행전 26장 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같이 가던 사람들은 빛은 봤는데,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못 들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을 사울에게만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보니,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3일간의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마치 요나가 3일 동안 바닷속 깊음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중에 사울에게 아나니아가 찾아와서 사울의 눈을 뜨게 해줍니다.

지금 사울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저주의 눈빛과 미움의 칼날이 다 무장해제가 된 것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죽음'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회심의 장면입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은혜롭게 보여졌습니다. 우리도 주 앞에서 진정으로 회심했다면, 이런 저주의 눈빛과 살기등등한 미움의 눈빛이 닫혀져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죽어져야 합니다. 주님이 이방인을 위한 주의 사도를 세우실 때, 먼저 눈을 감기게 하셨다는 것이 참으로 오묘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방식이 오묘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를 하니까, 비늘 같은 것이 눈에서 떨어지면서 사울의 눈이 떠졌습니다. 다시 떠진 눈은 이전의 눈과 다른 눈입니다. 다른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사도행전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소경이 되었던 사흘 동안, 사울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식음을 전폐했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3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내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사흘 동안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가장 중요한 그의 묵상의 초점이 무엇일까요? 예수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는 원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너무 끔찍하게 싫어했었습니다. 사울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통해서 들었던 그 도의 핵심은 ‘살아계신 주’였습니다.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았다는 사실이 지금 자기 눈 앞에서 사실로 확인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이 체험한 너무나 충격적이고 엄청난 사실이었습니다.

원래 사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주'가 아니었습니다. 이단의 괴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은 다 잡아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파괴자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3일 동안, 사울은 수백 번, 수천 번을 부인해보려고 했었을 것입니다. 그는 독한 사람이었기에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사울을 부르는 소리를 그는 분명히 들었습니다. 분명하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들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분명한 주관적인 체험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밝은 빛은 사울 혼자만이 봤던 것이 아니라, 동행하는 자들이 다같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살아계신다는 말이,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증언이 옳았던 것입니다. 사울은 이 사실 앞에 고꾸라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여기 보면 부활신앙이 없으면 믿음이 다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지탱하면서 가장 중요한 증언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9:6-7]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주께서 사울에게 “네가 무엇을 할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통해서 나를 만나주시고 또한 내가 행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의 전도의 과정 가운데서도, 이런 일이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처음 전도될 때, 우리를 인도하는 자를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