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본문: 요한복음 1:1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렸고, 회당에 늘 모여서 고상한 진리를 들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아주 다른 점입니다. 우리도 교회에 주일날 모이고, 또 늘 성경공부를 하러 옵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발견하려고 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디오게네스(Diogenes)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대낮에 등불을 들고 진리를 찾고자 아테네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진리가 어디 있습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헬라인들은 유니버셜 로고스(Universal Logos, 우주적 진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변하는 세계 가운데 변치 않는 진리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이에 그리스도인들이 “진리가 여기 있다”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다음 구절들은 사도요한의 고백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진리(The Logos)라고 선포합니다. 말씀(진리)이 사람이 되었음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word and deed)이 다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요18:38a)” 여기 보면, 세상의 통치자들도 진리를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 영혼이 그 진리를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영혼은 순수합니다. 우리 영혼은 이미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진리에 갈급해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수행법은 대개 육의 욕심을 끊고 침묵하고 묵상하게 합니다. 그럼 영혼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영혼이 무엇에 갈급한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육과 영으로 이분설(二分設)로 보기도 하고, 육, 혼, 영으로 삼분설(三分設)로 보기도 합니다. 설명을 약간 다르게 했을 뿐, 다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은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어린 아이가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직관적으로 반응하고 순수하게 반응합니다. 반면, 이미 성숙했다는 사람들은 문제입니다. 그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그들을 더 혼잡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가진 것이 해답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눈이 열려서 주의 진리를 보게 해달라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눈이 있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차원의 눈이 열려야 보이는 세계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3)” 성경에서 구원의 물을 길어서 올려야 합니다. 아무나 그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물에서 깊게 물을 길어 올리는 자만이 마실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또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하나님은 숨어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지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순수한 사람이 숨어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아침 눈을 열어
주의 진리를 보게 하소서.
성경에서 구원의 생수를 마시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