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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본문: 로마서 8:32-32절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지금 사도가 이야기 하려는 초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와 주의 핏값을 치루고 산 교회와 핏값을 치루고 산 나입니다. 이것을 누가 무효화 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도의 이 말이 따라 나오는 겁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 아들을 하나님 앞에 바쳤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신앙의 이야기를 이 편지를 읽는 유대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창 22:16]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희생,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우리가 회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그의 아들을 바쳤던 이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 보다,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우리가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우리가 듣고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아들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건져진 내가 아닙니까? 주께서 우리를 위해 비우셨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고, 그의 생명까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이 아닙니까? 이것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사랑이 아닙니까? 아들의 그 생명까지 내어주셔서 찾아진 나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귀함이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임한 구원이 너무도 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아들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건져진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누가 흔들 수 있겠습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입니다.

[로마서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지금 “누가 우릴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고발하리요”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복합적입니다. 우리 신앙 안에서 대적자가 누구입니까? 그리고 고발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먼저, 대적자는 밖에 있을 수 있습니다. 고발하는 자가 밖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어떤 고발자나 대적자로부터 우리를 변호하시고 중보하십니다. 대제사장인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보호받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사도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서 끌려 왔습니다. 사람들이 전부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를 주님께 물으면서 주님을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의미는 죄인이 죄인을 심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고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기 있던 자들이 돌을 내려놓고 다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 8:10)”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요 8:11)” 주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8:11)” 여기 매우 중요한 세계가 있습니다. 지금 요한 사도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초점이 무엇입니까? 죄 없으신 대제사장인 하나님의 아들이 그를 정죄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정죄하지 아니하는데, 그 누가 나를 정죄하고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을 받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특권은 아들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나를 누가 고발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적은 밖에서부터 올 수 있는 것이지만, 내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싸워야 될 신앙의 적은 무엇입니까? 자학입니다. 자학은 내가 나를 함부로 평가하고 함부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용서하셨고, 그 아들이 보혈의 피로 그 생명을 드려서 찾은 나입니다. 그렇게 구원해주신 내가 얼마나 주께는 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나 자신을 함부로 정죄하면 안됩니다. 이 사도의 자기 신앙의 고백과 선언을 보십시오. 모든 죄는 다 떠나가고 사도 안에 있는 평화를 보십시오. “누가 날 정죄할 수 있겠는가?” 이게 사도 안에 있는 자존입니다. 이것은 너무 귀한 겁니다. “누가 능히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발할 자가 있다면 하나님만이 고발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