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본문: 마태복음 9:9
(마태복음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공관복음(Synoptic Gospel)의 의미]
마태복음(The Gospel of Matthew)은 신약의 첫 번째 책으로서 배치된 매우 중요한 복음서입니다. 신약의 첫 세 개의 복음서, 마태(Matthew), 마가(Mark), 누가(Luke)를 공관복음(Synoptic Gospel, 共觀福音)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함께’(together)라는 뜻을 가진 ‘쉰’(syn, συν)과 ‘보는 것’(seeing, sight)이라는 뜻을 가진 ‘옵시스’(opsis, οψις)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즉 공관복음이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같은 견해를 가지고 공통적인 관점에서 기록된 복음을 의미합니다. 공관복음의 세 복음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흡사해서 서로 대조하며 보게 되면 많은 부분이 겹치고 매우 흥미 있습니다.
마태복음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복음 9장 9절은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매우 훌륭한 면이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따랐는데 매우 즉각적입니다.
이 시대 세리는 로마에 소속되어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긁어 가서 로마의 지배 질서에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세리를 동족의 배반자로 보고 매우 미워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삭개오도 세리였고 마태도 세리였습니다. 가령,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가 키가 작았으므로 돌무화과나무(개역개정, 뽕나무: 개역한글, sycamore-fig tree)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 보았겠습니까?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눅 19:3). 사실 키가 작은 사람은 군중 틈새로 더욱 빨리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삭개오의 키가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세리에 대하여 갖고 있었던 일반적인 정서가 악질의 민족의 배반자, 모든 이의 미움을 받았던 자였으므로 감히 군중 사이를 비집고 예수께로 나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간 모습을 볼 때, 남의 돈을 뺏고, 돈을 받으려 앙칼진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가운데서도 그 안에는 주님을 기다리고 만나고자 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영의 본성의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돈만 아는 세리 마태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 안에 매우 훌륭한 마음의 동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Parable of the Pharisee and the Tax Collector)’를 보면,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달리, 삭개오와 마태 같은 죄인, 세리는 성전 밖 저 멀리 서서 자기 죄를 자복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들 안에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자각과 자기의 죄를 자복하는 겸손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증거하는마태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향한 사랑은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이가 싫어하고 꺼리는 세관에 있는 죄인, 마태를 부르셔서 세우셨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자비입니다. 그를 직접 찾아가서 부르셨던 주님이셨습니다. 마태는 이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예수님은 나의 직업 때문에, 나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어떤 죄인인가를 보지 않으시고, 나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나의 죄적인 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먼저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품으시고 영접하셨습니다. 아무도 친구가 되어주지 않고, 모든 사람이 멸시하고 환영하지 않고, 누구나 다 미워하는 나를, 주께서 찾아오셔서 나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9:10-11]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7:34)라고 하며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 가셔서 같이 식사하셨습니다. 죄인을 부르시고, 품으시고,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위해 일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이 사랑을 마태는 알았던 것 같습니다. 증오와 멸시를 받았던 자가 이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습니다. 큰 미움을 받았고 소외 받던 자가 사랑을 경험했을 때 더 큰 은혜를 드러내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이 세계를 드러냈습니다.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그리스도의 놀라운 큰 사랑에 마태가 변화하여서, 자기 직업을 버리고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어디서부터 일어났습니까? 이것은 모두가 다 미워했던 자를 주께서 품으시고 그를 제자 삼으셨던 주님의 바다와 같은 놀라운 사랑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변화된 유대인 마태가 이제 펜을 들어서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몰라보고 잔인하게 십자가에 죽인 나의 스승, 예수는 바로 메시아 이시다. 그 분이 왕 중의 왕, 진짜 왕이시다.” 이것을 증거하고자 마태복음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