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본문: 로마서 13: 11-13절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바울은 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종말론으로써, 매우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교에는 세 개의 중추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론(Christology), 구원론(Soteriology), 종말론(Eschatology)입니다.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므로 종말론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종말론 없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힘이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이해가 있었다는 것을 이 바울의 글 속에서(“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살전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여기서도 바울은 너희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의 “때와 시기(times and seasons)”는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앞의 “때”는 크로노스(Chronos)이고 뒤의 “시기”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크로노스는 양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자는 일상적 시간을 의미하고 후자는 비상적 시간을 의미합니다. 카이로스는 때가 차서 새로운 상태의 변화가 일어나는 때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자면, 아기가 어머니의태 안에 있다가 때가 차면 지상으로 나옵니다. 또 우리가 지상의 삶을 살다가 때가 차면, 전혀 다른 세계로 상태의 변화가 되어서 옮겨지게 됩니다. 카이로스는 그렇게 비상적이고 특별한 때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던 때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이전의 그 어떤때와는 매우 다른 특별한 때였습니다. 바울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말하면서, 지금이 비상적인 카이로스의 때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로마와 데살로니가의 교우들은 때에 대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자기가 사는 때를 정말 잘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양적으로는 동일한 24시간을 가지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때가 질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은 카이로스를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은 카이로스를 압니다. 구원과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지는 이 특별한 때를 아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바울이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죄의 잠(slumber)을 자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때를 알지 못하고 일상의 굴레 속에서 늘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영혼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이 편지를 통해서 ‘지금 이 때는 자다가 깰 때이다. 지금 이 때가 바로 구원이 임하는 때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과 똑같습니다. [살전 5:5-8]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그리스도인은 잠들면 안되고 정신을 차리고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악 가운데 취해서 살면 안됩니다. 바울은 우리의 삶이 치열한 영적 투쟁 가운데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갑옷과 투구’를 입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시대에 로마의 군인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갑옷과 투구를 쓴 군인의 비유는 그들에게 퍽 이해가 잘 되었을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혀 주시는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울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벗으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습(오래된 습관, 죄적 행실)은 헌 옷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벗고, 그리스도께서 입혀 주시는 ‘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의의 행실을 행함으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행실을 빨고 새 옷을 입어야 천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그 옷을 입혀 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자칫하면 세상에 휩쓸리고 방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지금 로마의 교우들에게 너희가 구원을 받았으나 긴장성을 늦추지 말고 성화와 영화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상과 침륜에 빠지거나 세상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칭의함을 받은 것에 머물지 말고 성화(성결)의 옷을 입고, 영화의 자리까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 #복음 #카이로스 #투구 #성결 #카이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