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본문: 사도행전 20: 21-29
[행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의 가르침의 첫번째는 회개였습니다. 그는 정말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세례요한도 “회개하라”고 말했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회개는 은혜를 받는 첩경이자 시작점입니다.
베드로는 시작부터 죄를 찔렀습니다. 세례요한과 방식이 같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세례요한이 말했었습니다. 베드로가 직접 찌른 죄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 죽인 것입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고린도전서 4장 10절에 바울이 말한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예수 죽인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 죄를 찌르니까 듣는 백성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전파한 복음이 정말 정확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시작부터 이렇게 보혈의 십자가 메세지를 똑바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힘이 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을 때 감격이 생기고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건강한 자에게 의원이 쓸데없는 것입니다. 죄를 알지 못하면 회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고 새생명을 받을 때, 힘이 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동문으로 나오셔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며 울면서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7-39)
하나님께 대한 회개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해야 할 죄가 무엇입니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를 죽이고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버림을 당하고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의 죄값을 치르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야 할 아무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지자를 보내셨건만, 그들은 그 파송된 자를 돌로 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을 보내셨건만, 아들을 거부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께서 통곡하시는 것입니다. 암탉이 새끼를 품으려고 한 것처럼 너희를 품으려고 했지만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이 회개해야 합니다. 인간이 그렇게 주를 영접하지 않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속의 길로 가셔서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 은혜를 받는 통로이자 채널이 뭡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가르쳤습니다.
[행20: 22-24]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람 한 명이 예수 믿고 바로 설 때 이런 환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이 개종을 했을 때, 유대 신앙의 수호자가 갑자기 원수가 되었으니,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가 당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강의 위험, 매맞음, 형제 동족의 위험 등 수많은 고난이 나옵니다. 그런데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이 길을 갔습니다. 큰 일을 했던 자들의 철학이 이렇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생명을 다 바쳐서 합니다. 여기 사도를 보십시오. “내가 목숨을 걸고 복음 전파를 마쳐야겠다.” 여러분도 이런 각오를 가진다면, 여러분은 위대한 역사를 쓸 것입니다. “내 생애 안에 모든 것을 이뤄야겠다.” 바울은 이런 각오를 가지고 산 분이었습니다. 이런 체취와 자세가 그에게서 풍겨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이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고별설교라고 합니다. 이 삶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는 진지합니다.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주의 핏값으로 세운 곳입니다. 그래서 절대 무너지면 안됩니다. 절대 빼앗겨도 안되고 물러서도 안됩니다. 주의 것으로 삼으신 곳은 빼앗기지 아니하고 너희가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핏값으로 산곳이기때문에 그렇습니다.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교회에는 항상 이리가 들어옵니다. 이것을 지키는 자가 목자입니다. 바울은 목자를 감독자라고 표현했습니다. 헬라어로 에피스코퍼스(episcopus)인데, 여러분은 에피스코팔 쳐치(Episcopal church)를 기억할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지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나운 이리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양떼를 유혹합니다. 수많은 이단의 사상, 세속의 사상, 잘못된 철학들이 성도를 유혹합니다. 절대라는 것은 없고 길은 여러 개라고, 그리스도도 여러 개라고, 여기에도 진리가 있고 저기에도 진리가 있으며 절대 진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바울시대에는 바울이 “손할례당을 삼가라(빌 3:2)”고 했습니다. 손으로 할례하자는 주장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초대교회에는 영지주의의 공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이서, 삼서는 이것을 경고하면서 교회의 연합을 촉구하면서 쓰여졌습니다. 가현설(假現說, Docetism),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가 나와서 복음에 물을 탔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오직 예수만을 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