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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29일차 

 

베드로의 부인

요한복음 18 장 22-27 절

[요 18:22-23]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는 자신이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말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요 18: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안나스는 자신이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사위인 가야바에게 주님을 넘겼습니다.

[요 18:25-27]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주님께서 심문당하시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는 밖에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불이 환하지 않아서 서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하인들과 같이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베드로를 알게 되었습니까? 다른 복음서(눅 22 장)를 보면,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알아 보았습니다. 불이 약해질 때, 불에 장작을 넣으면 불이 확 붙어서 아주 환해집니다. 그 때 함께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를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문제는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주님의 제자, 주님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막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팔레스타인에서는 닭이 두 번째 우는 시간이 새벽 세 시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증인으로서 어떻게 했어야 했습니까? 그것이 사도행전 4 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4 장’을 보겠습니다. [행 4: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행 4:12-13]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여기 변화된 당당하고 용감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심문했던 가야바의 심문의 자리에서 이런 증언자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수제자였던 베드로 안에는 부끄럽고 비겁하고 옹졸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증거자로 나서서 말해야 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증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께서 심문당하시는 자리에서 주님을 변호하고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자,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통곡했습니다.

[눅 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사도 누가는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썼습니다. 이 세계가 정말 깊습니다. 베드로 안에 “조금만 더 참을 걸…”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닭 울기 전에 네가 부인하리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닭 울기 전’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에도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넘어설 지점까지 다 왔는데, 거기서 넘어지고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새벽이 왔습니다. 그가 조금만 더 참았다면, 그 고비를 조금만 더 견뎠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다 와서 배반합니다. 다 와서 무너집니다. 물론 새벽이 오기까지 힘든 것이 있습니다. 극한의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조금만 지나면 닭이 울고 새벽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극한의 힘듦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을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 저런 십자가, 각양각색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고 있습니다. 닭이 울면 새벽이 옵니다. 칠흑같은 어둠의 모든 것이 끝나고 새벽이 옵니다. 우리는 닭 울기 바로 직전에 주를 부인했던 이 제자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통곡을 항상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과 자극을 줍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반문하게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역사적인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눅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무너질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무너지고 실족할 때, 그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를 향한 사랑과 믿음을 보십시오. 주님의 위로와 권면이 ‘누가복음 22 장’에 나와있습니다. “네가 무너진다 할지라도, 다시 일어설 것이다. 일어설 때 네가 다시 고침을 받고 더 강건해져서 많은 이들을 이끌도록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이후에, 베드로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는 이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고 기도함으로써, 주님을 부인하거나 십자가를 내버리는 슬픈 역사를 만드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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